“일 잘하는 사람은 우선순위를 잘 정한다.”

그 말을 믿고 아이젠하워 매트릭스를 배웠다.
한 달 뒤, 나는 매일 아침 30분을 우선순위 정리에 썼다. 정작 일은 하나도 못 했다.
우선순위의 시작


모든 건 생산성 책에서 시작됐다. 성공한 사람들은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한다고 했다.
“그래, 나도 체계적으로 해보자.”
유튜브에서 본 방법론들:
- 아이젠하워 매트릭스 (긴급/중요)
- ABC 우선순위 (A=반드시, B=해야, C=하면좋음)
- MIT (Most Important Tasks)
- 1-3-5 룰 (대1, 중3, 소5)
“전부 좋아 보이는데. 일단 다 해볼까?”
완벽한 생산성 시스템을 찾느라 3년을 보냈던 경험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시작했다.
아이젠하워 매트릭스

아침마다 노트를 열었다.
긴급+중요: 1사분면
중요+비긴급: 2사분면
긴급+비중요: 3사분면
비긴급+비중요: 4사분면
할 일 목록을 네 칸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메일 확인”은 어디지?
긴급한가? 급한 이메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긴급.
중요한가? 업무니까… 중요?
1사분면에 넣었다.
“보고서 작성”은?
마감이 다음 주니까… 비긴급.
중요한가? 당연히 중요하지.
2사분면.
“회의 참석”은?
오늘 3시니까 긴급.
중요한가? 참석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비중요?
3사분면.
30분이 지났다.
매트릭스는 완성됐다. 정작 일은 하나도 시작 안 했다. Todoist로 할 일을 정리하는 것이 할 일이 되었던 상황과 똑같았다.
우선순위 고민의 무한 루프
문제는 우선순위가 고정되지 않는다는 거다.
아침에 2사분면이던 게 오후가 되면 1사분면이 됐다.
3사분면이라고 미뤘던 게 갑자기 긴급해졌다.
“이거 다시 정리해야 하나?”
매일 아침 30분, 점심 후 15분.
우선순위 정리만 하루에 45분을 썼다.
실제 일 하는 시간?
우선순위 정하느라 늦게 시작해서 30분 줄었다.
순수익: -15분.
우선순위를 정하느라 오히려 시간을 잃었다.
모든 게 중요해 보였다
우선순위의 진짜 문제는 뭘까?
모든 게 중요해 보인다는 거다.
- 이메일? 빨리 답해야 관계 유지지.
- 보고서? 당연히 중요하지.
- 회의? 팀워크에 필요하지.
- 공부? 성장을 위해 해야지.
A, B, C로 나눠보니까 전부 A였다.
“이건 A, 이것도 A, 이것도… 음, 일단 A.”
A가 15개면 우선순위가 있는 게 아니다.
우선순위를 정하느라 할 일을 미뤘다

아이러니한 상황이 생겼다.
“보고서 써야 하는데, 일단 우선순위부터 정리하자.”
노션을 열었다. 오늘 할 일을 적었다. 카테고리를 나눴다. 순서를 정했다. 마감일을 입력했다. 노션 대시보드 꾸미다가 일을 못 했던 경험이 반복됐다.
1시간이 지났다.
보고서는 한 줄도 못 썼다.
우선순위 정리가 미루기의 도구가 됐다. “일하기 전에 정리부터”라는 명분으로.
정리하는 건 기분 좋다. 정돈된 느낌이 든다. 생산적인 것 같다.
실제로는 일을 피하고 있었을 뿐이다.
우선순위 시스템도 늘어났다
아이젠하워 매트릭스가 완벽하지 않은 것 같았다.
“ABC 방식도 해볼까?”
둘 다 하기로 했다.
아침엔 매트릭스로 분류하고, ABC로 다시 정렬했다.
결과?
시간이 두 배로 늘었다. 45분이 90분이 됐다.
“1-3-5 룰도 좋다던데…”
이제 세 가지 시스템을 병행했다. 할 일 관리 앱을 12개나 써봤지만 정작 일은 못 했던 경험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일이 3개밖에 없는 날에도 우선순위 정리에 1시간을 썼다.
실험: 우선순위 없이 일주일
어느 날 실험을 했다.
“그냥 할 일 목록만 적고, 보이는 것부터 하자.”
일주일 동안 우선순위 시스템을 전부 껐다.
결과:
- 아침 정리 시간: 0분 (기존 45분)
- 완료한 일: 기존과 비슷
- 스트레스: 훨씬 적음
충격이었다.
우선순위 정리 안 해도 일은 똑같이 됐다. 아니, 더 많이 됐다.
왜?
시작이 빨랐다. 고민 없이 바로 일을 시작했다. 그 시간에 일을 더 했다. 타임 블로킹을 완벽하게 짰는데 하나도 안 지켰던 경험에서도 비슷한 교훈을 얻었다.
깨달음
우선순위를 정하는 건 선택의 고통을 미루는 행위였다.
“뭘 먼저 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싫으니까 시스템에 맡겼다. 매트릭스가 알려주겠지. ABC가 정해주겠지.
하지만 시스템은 답을 안 줬다. 결국 내가 판단해야 했다.
그 판단에 45분을 쓰느니, 그냥 눈에 보이는 것부터 하는 게 나았다.
지금의 방식

지금은 간단하다.
- 아침에 할 일 3-5개를 적는다. (5분)
- 첫 번째 것부터 한다.
- 끝나면 다음 것을 한다.
우선순위? 안 정한다.
“이거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정하느라 30분 쓰는 것보다 일단 시작하는 게 낫다.
어차피 하루에 진짜 중요한 일은 1-2개다. 나머지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매트릭스로 분류할 필요가 없다. 비밀번호 관리자를 4개나 쓰다가 로그인을 못 했던 상황과 마찬가지로, 도구가 많다고 좋은 게 아니다.
우선순위가 필요한 경우
물론 예외는 있다.
마감이 오늘인 일이 3개 이상일 때.
이때는 빠르게 순서를 정해야 한다. 하지만 매트릭스 필요 없다. “가장 빨리 끝나는 것”부터 하면 된다.
그 외에는?
그냥 시작하면 된다.
결론
할 일에 우선순위 매기느라 할 일을 못 했다.
우선순위 시스템은 함정이다. 체계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작을 미루는 도구가 된다.
진짜 생산적인 사람들은 우선순위를 오래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시작한다.
매트릭스 그리는 데 30분 쓰는 것보다, 그 30분에 일 하나 끝내는 게 낫다.
지금 할 일이 보이면, 그냥 하면 된다. RSS 피드를 200개 구독했는데 읽은 건 3개였던 이야기에서도 느꼈듯이, 선택지가 많으면 오히려 아무것도 못 한다.
우선순위는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