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기억할 수 없었다
“이것도 잊으면 안 되는데.”
중요한 일을 놓칠까 봐 불안했다. 회의 시간, 약속, 마감일, 심지어 물 마시기까지. 모든 걸 기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리마인더를 설정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알림 시스템

처음엔 iOS 기본 Reminders로 시작했다. 간단했다. “오후 3시에 회의” 설정하면 3시에 알람이 울렸다.
하지만 하나씩 늘어났다.
- iOS Reminders: 시간 기반 알림
- Google Tasks: Gmail과 연동된 작업 알림
- Todoist: 프로젝트별 마감일 알림
- Any.do: 위치 기반 알림 (집에 도착하면 우유 사기)
- Apple Calendar: 회의 30분 전, 10분 전 이중 알림
각 앱마다 장점이 달랐다. 모두 설치했다.
하루 50개의 알람
리마인더 설정이 습관이 됐다.
아침:
– 07:00 “기상” 알람
– 07:30 “물 마시기” 알람
– 08:00 “출근 준비” 알람
– 08:30 “집 나서기” 알람
오전:
– 09:00 “업무 시작” 알람
– 09:30 “이메일 확인” 알람
– 10:00 “프로젝트 A 작업” 알람
– 10:30 “회의 준비” 알람
– 11:00 “회의 시작” 알람 (30분 전, 10분 전 포함하면 3개)
점심:
– 12:00 “점심시간” 알람
– 12:30 “산책” 알람
– 13:00 “오후 업무 준비” 알람
오후:
– … (생략, 너무 많음)
저녁:
– 18:00 “퇴근” 알람
– 19:00 “저녁 식사” 알람
– 20:00 “운동” 알람
– 21:00 “독서” 알람
– 22:00 “내일 할 일 정리” 알람
– 23:00 “취침 준비” 알람
일주일 계산:
– 하루 평균 50개 알람
– 주말 포함 7일 = 350개
– 한 달이면 1,500개
모든 일에 알람을 설정했다. “이제 아무것도 안 잊어버리겠지!”
알람 피로증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알람이 울렸다.
“물 마시기”
“확인” 버튼 누름. 물은 안 마심.
10분 후, 또 알람.
“이메일 확인”
“확인” 버튼 누름. 이메일은 안 봄.
또 10분 후.
“프로젝트 작업”
“확인” 버튼 누름. 작업은 안 함.
알람을 끄는 게 습관이 됐다.
리마인더를 보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그냥 알람을 끄고 있었다. 마치 아침 기상 알람을 5번째 스누즈 버튼 누르듯이.
Slack 알림을 하루 종일 무시하던 것과 똑같은 패턴이었다. 알림이 많으면, 뇌가 알림 자체를 차단한다.
모든 알람이 긴급하면, 아무것도 긴급하지 않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알람 피로(Alarm Fatigue)” 현상이었다.
의료 현장에서 발견된 개념인데, 병원 기기에서 알람이 너무 자주 울리면 의료진이 알람을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도 똑같았다.
알람이 많을수록:
– 각 알람의 중요도가 떨어진다
– 알람을 무시하는 게 습관이 된다
– 정작 중요한 알람도 놓치게 된다
“오늘 마감일!”이라는 알람도, “물 마시기”와 같은 수준으로 느껴졌다. 둘 다 그냥 “확인” 버튼 누르는 대상이었다.
알람 설정이 또 다른 일이 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매일 저녁 루틴:
– 내일 할 일 리스트 작성
– 각 할 일마다 리마인더 설정
– 시간 조정 (너무 빡빡하면 10분씩 늦춤)
– 중요도에 따라 알림 횟수 조정
– 여러 앱에 중복 설정 (혹시 몰라서)
소요 시간: 30분
Todoist에서 할 일을 정리하는 데 시간을 쓰던 것과 똑같았다. 도구 관리가 실제 일보다 오래 걸렸다.
리마인더를 설정하는 시간이, 실제 일을 하는 시간보다 길었다.
특히 Todoist에서 반복 작업 설정할 때는 더 복잡했다.
– “매주 월요일 오전 9시”
– “2주마다 금요일 오후 3시”
– “매달 첫째 주 수요일”
문법을 외워야 했다. 이게 생산성 도구인가?
진짜 중요한 건 놓쳤다
아이러니하게도, 리마인더를 가장 열심히 썼던 달에 가장 많은 일을 놓쳤다.
예시:
– “프로젝트 마감” 알람: 울렸지만 무시함 → 마감 놓침
– “고객 미팅” 알람: 30분 전에 울렸지만 확인만 하고 잊음 → 미팅 놓침
– “운동하기” 알람: 매일 울렸지만 한 번도 안 함
왜?
알람이 너무 많아서, 뇌가 알람 자체를 무시하도록 학습했기 때문이다.
울프 크라이 효과(The Boy Who Cried Wolf). 거짓 경보가 많으면, 진짜 경보도 무시하게 된다.
화면 시간 앱에서 목표 숫자에 집착하다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쳤던 것처럼, 리마인더 개수에 집착하다 정작 중요한 일을 놓쳤다.
알람을 모두 지웠다

2개월 후, 리마인더를 거의 다 삭제했다.
남긴 알람:
– 진짜 중요한 약속 (회의, 미팅) – 딱 10분 전 1번만
– 절대 놓치면 안 되는 마감일 – 하루 전 1번, 당일 1번
– 그게 다
지운 알람:
– “물 마시기” (목마르면 마신다)
– “운동하기” (하고 싶을 때 한다)
– “이메일 확인” (필요할 때 본다)
– “업무 시작” (아침에 자연스럽게 시작한다)
결과:
– 하루 알람 개수: 50개 → 3~5개
– 알람 무시 횟수: 거의 매번 → 거의 없음
– 놓친 중요한 일: 많았음 → 거의 없음
역설적이게도, 알람이 줄어들자 놓치는 일도 줄었다.
깨달은 것
리마인더의 함정:
1. 모든 걸 알람 설정하면, 뇌가 생각을 멈춘다
– “알람이 알려줄 거야” → 스스로 기억 안 함
– 알람 의존증 발생
– 알람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함
포모도로 타이머에 의존하다 타이머 없이는 집중 못 하게 됐던 것과 같았다. 도구에 의존하면,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잃는다.
2. 알람이 많을수록 무시하게 된다
– 알람 피로증
–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의 구분이 사라짐
– “확인” 버튼만 누르는 기계가 됨
3. 리마인더 관리가 또 다른 일이 된다
– 설정하는 데 시간 소비
– 조정하는 데 정신력 소비
– 실제 일할 시간은 줄어듦
새로운 원칙
“진짜 중요한 것만 알람”
3가지 기준:
1. 놓치면 큰일 나는가?
2. 내가 자연스럽게 기억 못 하는가?
3. 특정 시간에 꼭 해야 하는가?
세 가지 모두 “예”일 때만 알람 설정.
예시:
– 고객 미팅 10분 전: ✅ (3가지 모두 해당)
– 물 마시기: ❌ (큰일 안 남, 자연스럽게 목마르면 마심)
– 운동하기: ❌ (특정 시간에 안 해도 됨)
– 이메일 확인: ❌ (자연스럽게 확인함)
결론: 적을수록 강력하다
리마인더의 역설은 명확하다.
문제:
– 알람이 많으면 모두 무시하게 된다
– 리마인더 관리가 또 다른 일이 된다
– 뇌가 스스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해결책:
– 진짜 중요한 것만 알람 설정
– 나머지는 스스로 판단
– 알람에 의존하지 않기
50개 알람을 울리며 모든 걸 놓쳤던 때보다, 5개 알람으로 중요한 것만 챙기는 지금이 훨씬 낫다.
가장 효과적인 리마인더는 적게 쓰는 것이다.
P.S. 지금도 가끔 “이것도 알람 설정해야 하나?” 생각이 든다. 하지만 참는다. 정말 중요하면 잊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