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축키를 완벽하게 외웠는데 일은 더 느려졌다

“단축키를 쓰면 마우스보다 10배 빠르다”

"단축키를 쓰면 마우스보다 10배 빠르다"

유튜브 생산성 영상에서 봤다.

“진짜 프로들은 마우스를 안 써요. 단축키로 다 해결합니다.”

영상 속 개발자는 화면을 쳐다보지도 않고 키보드만 두드렸다. 창이 열리고, 닫히고, 파일이 열리고, 저장되고. 마우스 커서는 화면 구석에 가만히 있었다.

“나도 저렇게 되면 생산성이 폭발하겠다!”

노션 템플릿을 완벽하게 만들면 생산적이 될 거라고 믿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와 똑같은 흥분이었다.

그날부터 단축키 마스터가 되기로 했다.


단축키 치트시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단축키 치트시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모니터 옆에 붙은 단축키 치트시트

먼저 쓰는 프로그램들의 단축키를 정리했다.

VS Code:
– Cmd+Shift+P: 명령 팔레트
– Cmd+P: 파일 빠른 열기
– Cmd+D: 같은 단어 선택
– Cmd+Shift+L: 모든 같은 단어 선택
– Opt+Shift+F: 코드 정렬
– Cmd+/: 주석 토글
– … (47개 더)

Chrome:
– Cmd+T: 새 탭
– Cmd+W: 탭 닫기
– Cmd+Shift+T: 닫은 탭 복구
– Cmd+L: 주소창 포커스
– … (32개 더)

Notion:
– /: 블록 메뉴
– Cmd+Shift+H: 하이라이트
– Cmd+E: 인라인 코드
– … (28개 더)

맥 시스템:
– Cmd+Space: Spotlight
– Cmd+Tab: 앱 전환
– Ctrl+좌우: 데스크톱 전환
– … (41개 더)

A4 용지 3장에 빼곡하게 정리했다. 프린트해서 모니터 옆에 붙여놨다. 북마크를 완벽하게 정리하던 때와 비슷한 집착이었다.

“이제 외우기만 하면 돼!”


외우는 게 일이 되었다

외우는 게 일이 되었다

단축키 연습하느라 손가락이 꼬인 모습

문제는 외워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Cmd+Shift+K가 뭐였더라? 아, 줄 삭제. 근데 Notion에서는 다르지 않았나?

단축키를 쓰려다가 멈추고, 치트시트를 보고, 다시 키보드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뭘 하려고 했는지 까먹었다.

“더 체계적으로 연습해야겠어.”

Anki에 단축키 플래시카드를 만들었다. 매일 아침 15분씩 복습했다. Evernote에 모든 걸 저장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도 정리하는 게 일이 됐었는데.

“Cmd+Opt+1은?”

“… VS Code에서 사이드바 토글?”

“정답! 다음, Cmd+Shift+E는?”

단축키 암기가 하루 일과가 되었다.


앱마다 다른 단축키가 문제였다

같은 동작인데 프로그램마다 단축키가 달랐다.

동작 VS Code Notion Chrome
저장 Cmd+S Cmd+S (해당 없음)
실행취소 Cmd+Z Cmd+Z Cmd+Z
검색 Cmd+F Cmd+F Cmd+F
전체 검색 Cmd+Shift+F Cmd+Shift+P Cmd+Shift+F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미묘하게 다른 것들이었다.

VS Code에서 Cmd+D를 누르면 같은 단어 선택. Notion에서 Cmd+D를 누르면… 복제? 아니면 삭제?

손가락이 기억하는 대로 눌렀다가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왔다. 실행취소. 다시 시도. 또 실수.

“단축키가 헷갈리면 안 돼. 더 연습해야 해.”


커스텀 단축키의 늪

“기본 단축키가 불편하면 바꾸면 되지!”

VS Code 키바인딩을 커스터마이징하기 시작했다.

Cmd+Shift+K가 너무 멀다. Cmd+K로 바꾸자. 근데 Cmd+K는 이미 다른 기능에 할당되어 있네. 그럼 그건 Cmd+J로… 근데 Cmd+J는…

도미노처럼 연쇄 수정이 시작됐다. 자동화 워크플로우를 100개나 만들었던 경험과 정확히 같은 패턴이었다.

Karabiner-Elements도 설치했다. Caps Lock을 Hyper 키로 바꾸고, Hyper+H/J/K/L을 화살표로 매핑하고…

Alfred 워크플로우도 만들었다. Opt+Space로 클립보드 히스토리, Cmd+Shift+Space로 스니펫…

2주가 지났다.

설정 파일만 12개가 되었다. 새 맥북으로 바꾸면 이걸 다 다시 설정해야 했다.


“그래서 뭐 했어요?”

회사 동료가 물었다.

“요즘 뭐 해요? 맨날 키보드만 두드리던데.”

“아, 단축키 연습 중이에요. 생산성 높이려고요.”

“그래서 그 프로젝트는요? 지난주에 시작한다던 거.”

“…”

2주 동안 단축키를 외웠다. Anki 복습 시간만 7시간. 키바인딩 설정에 3시간. 치트시트 만드는 데 2시간.

12시간.

근데 그 12시간 동안 실제로 코딩은 30분도 안 했다.

단축키로 빨라질 미래의 시간을 위해, 현재의 시간을 다 썼다. 1초를 아끼려고 워크플로우 최적화만 하다가 3시간을 날린 이야기가 남 일이 아니었다.


마우스를 쓰는 게 죄책감이 들었다

마우스를 쓸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

단축키를 외운 후에도 문제였다.

무의식적으로 마우스에 손이 갔다. 그때마다 “아, 이건 Cmd+뭐였는데…” 하고 손을 거뒀다.

마우스로 클릭하면 0.5초. 단축키 생각하고 누르면 2초.

그래도 단축키를 써야 할 것 같았다. 마우스를 쓰면 “제대로 안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포모도로 25분을 정확히 지키지 못하면 실패한 것 같았던 때와 똑같은 강박이었다.

클릭 한 번에 될 일을, 굳이 단축키로 하려고 버벅거렸다.


진짜 빠른 사람들을 관찰했다

실제로 일 잘하는 선배를 지켜봤다.

마우스도 쓰고, 단축키도 썼다. 섞어서. 상황에 맞게.

“선배, 단축키 다 외우셨어요?”

“다? 아니, 자주 쓰는 것만 몇 개.”

“몇 개요?”

“한 10개? 15개? 잘 모르겠는데. 저장, 실행취소, 복사, 붙여넣기… 기본적인 거.”

선배는 단축키 치트시트가 없었다. Karabiner도 안 썼다. 그냥 기본 설정 그대로였다.

근데 일은 나보다 3배는 빨랐다.


결국 깨달았다

단축키는 도구지, 목표가 아니다.

자주 하는 동작 5-10개만 단축키로 하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마우스로 해도 된다.

0.5초 절약하려고 30초 생각하면 손해다. 그냥 마우스로 클릭하면 된다.

커스텀 설정은 유지보수 비용이 있다. 기본 설정이 충분하면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

지금 외운 단축키 전부:
– Cmd+S: 저장
– Cmd+Z: 실행취소
– Cmd+C/V: 복사/붙여넣기
– Cmd+Tab: 앱 전환
– Cmd+T/W: 탭 열기/닫기
– Cmd+F: 검색

이 정도면 된다.

148개 외우려던 시절이 부끄럽다. 독서 기록 앱에 책을 등록하는 게 독서가 되어버렸던 경험이 떠올랐다. 수단이 목적이 되면 본질을 잃는다.


효율이라는 착각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를 외치며 정작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있다.

2주 전의 나였다.

손가락이 빨라져도 머리가 따라가지 않으면 소용없다. 중요한 건 타이핑 속도가 아니라 생각의 속도다.

단축키 100개를 외우는 시간에, 코드 100줄을 짜는 게 낫다.

지금 쓰는 단축키는 10개도 안 된다. 마우스도 자주 쓴다. 근데 일은 더 빨리 끝난다.

도구 최적화에 시간 쓰지 말고, 그 도구로 뭘 만들지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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