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레드시트로 모든 걸 관리하려다가 스프레드시트 관리가 일이 됐다

스프레드시트 하나면 모든 걸 추적할 수 있겠지

스프레드시트 하나면 모든 걸 추적할 수 있겠지

수많은 탭이 있는 복잡한 스프레드시트 화면

“데이터로 관리하면 개선할 수 있어.”
“측정할 수 없으면 개선할 수 없다.”
“스프레드시트면 뭐든 추적 가능해.”

그래, 내 삶을 데이터로 관리하자.

스프레드시트 제국의 시작

스프레드시트 제국의 시작

계기:

유튜브에서 봤다.

“저는 모든 걸 스프레드시트로 관리해요. 운동, 수면, 독서, 지출, 기분까지!”

화면에 떴다. 알록달록한 차트, 깔끔한 표, 자동 계산되는 통계.

“우와… 저러면 삶이 완전 체계적이겠다!”

결심: 나도 내 삶을 스프레드시트로 정복하겠다.

시간 추적 앱을 쓰면서 시간을 더 낭비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그때도 측정이 답이라고 생각했었다.

첫 번째 시트: 운동 기록

첫 번째 시트: 운동 기록

탭 1: Exercise Tracker

열 구성:
– 날짜
– 운동 종류
– 시간 (분)
– 강도 (1-10)
– 칼로리 소모 (계산식)
– 메모

조건부 서식:
– 강도 8 이상: 녹색
– 강도 5-7: 노란색
– 강도 4 이하: 빨간색

차트 추가:
– 주간 운동 시간 그래프
– 월간 칼로리 소모 추이

제작 시간: 2시간

“완벽해. 이제 운동만 하면 돼.”

두 번째 시트: 독서 기록

탭 2: Reading Log

열 구성:
– 책 제목
– 저자
– 시작일
– 완료일
– 총 페이지
– 읽은 페이지
– 진행률 (자동 계산)
– 별점
– 한 줄 평

추가 기능:
– 연간 독서 목표 대비 진행률
– 장르별 분류
– 월별 독서량 그래프

제작 시간: 1.5시간

독서 기록 앱에 책 등록하는 게 독서가 됐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미 한 번 겪은 패턴이었는데.

시트 폭발

1주일 후:

탭 목록:
– Exercise Tracker (운동)
– Reading Log (독서)
– Finance (지출/수입)
– Sleep Log (수면)
– Mood Tracker (기분)
– Habit Tracker (습관)
– Goals (목표)
– Projects (프로젝트)
– Food Log (식단)
– Water Intake (물 섭취)

총 탭: 10개

총 제작 시간: 15시간+

완벽한 시스템의 탄생

수십 개의 탭과 복잡한 공식이 있는 스프레드시트

자랑스러운 기능들:

1. 자동 계산:
– BMI 자동 계산
– 월간 지출 합계
– 수면 평균 시간
– 습관 달성률

2. 크로스 참조:
– 운동량과 수면 품질 상관관계
– 지출과 기분 연관성
– 독서량과 생산성 비교

3. 대시보드:
– 종합 현황 탭
– 모든 지표 한눈에
– 예쁜 차트들

“이제 내 삶이 완전히 데이터화됐어!”

습관 트래커를 500일 채웠는데 습관은 안 생겼던 경험과 똑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유지의 현실

첫째 날:

아침:
– 수면 데이터 입력 (3분)
– 기분 기록 (1분)
– 아침 물 섭취 기록 (30초)

점심:
– 식단 기록 (5분)
– 물 섭취 업데이트 (30초)

저녁:
– 운동 기록 (3분)
– 저녁 식단 (5분)
– 지출 내역 (5분)
– 독서 진행률 (2분)
– 습관 체크 (3분)
– 하루 종합 기분 (2분)

일일 데이터 입력: 약 30분

둘째 날:

“어제 점심 뭐 먹었더라?”
“운동 시간이… 45분? 50분?”

데이터 정확성 고민: 추가 10분

셋째 날:

“아, 어제 기록 안 했네.”

밀린 데이터 입력: 20분

문제 발생

1주일 후:

문제 1: 시간 부족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잠깐, 어제 데이터 입력 안 했네.”
(입력하느라 20분)
“…이제 운동할 시간이 없네.”

운동 기록은 있는데 운동은 못 함.

북마크를 정리하느라 정작 북마크를 못 쓴 경험이 떠올랐다. 정리 자체가 일이 되어버린다.

문제 2: 강박

“물 마실 때마다 기록해야 해.”
“이거 기록 안 하면 데이터가 빈다.”

물 마시는 게 스트레스.

문제 3: 정확성 강박

“어제 8시에 잤나? 8시 15분이었나?”
“칼로리 계산이 정확한가?”
“강도가 7인가 8인가…”

데이터 입력이 고민 시간으로.

문제 4: 분석 마비

차트를 봤다.

“음… 수면과 운동의 상관관계는…”
“이 패턴이 의미하는 게 뭐지?”

분석은 했는데 행동은 안 함.

데이터 입력의 역설

한 달 후 현황:

운동 기록:
– 입력한 날: 28일
– 실제 운동한 날: 8일

독서 기록:
– 입력한 책: 5권
– 완독한 책: 0권

지출 기록:
– 입력한 내역: 150건
– 개선된 지출 습관: 없음

데이터는 완벽한데 삶은 안 변함.

Evernote에 모든 걸 저장하면서 수집가가 됐던 함정과 같은 역설이었다. 모으는 것이 목표가 됐다.

깨달음의 순간

스프레드시트를 보며 지친 표정을 짓는 모습

어느 날:

“스프레드시트에 얼마나 시간 쓰지?”

계산:

  • 일일 입력: 30분
  • 주간 정리/분석: 2시간
  • 월간 리뷰: 3시간

월간 총: 약 20시간

그 시간에 할 수 있었던 것:
– 운동: 20회
– 독서: 책 2권
– 부업: 수입 발생 가능

“스프레드시트 관리하느라 관리 대상을 못 하고 있어.”

더 심각한 문제

측정이 목표가 됨.

원래 목표: 건강해지기
바뀐 목표: 데이터 완성하기

원래 목표: 책 많이 읽기
바뀐 목표: 독서 기록 채우기

원래 목표: 돈 아끼기
바뀐 목표: 지출 내역 정리하기

측정이 수단에서 목적으로.

체크박스 채우는 것이 습관이 된 역설이 생각났다. 기록이 행동을 대체해버린다.

실험

2주간:

모든 스프레드시트 접근 금지.

대신:

  • 운동: 그냥 하기
  • 독서: 그냥 읽기
  • 지출: 통장 잔액만 확인

결과:

운동: 12회 (기존 8회 → 50% 증가)
독서: 1권 완독 (기존 0권)
지출: 비슷함

데이터 없이 삶이 더 나아짐.

왜 그럴까?

1. 인지 부하 감소

기록 안 해도 되니까 → 그냥 행동함

2. 즐거움 회복

운동이 “데이터 생성 작업”에서 “그냥 운동”으로
독서가 “진행률 올리기”에서 “책 읽기”로

3. 시간 확보

기록 안 하니까 → 실제 행동 시간 확보

4. 분석 마비 탈출

“이 데이터가 의미하는 건…” 대신 “일단 하자”

새로운 방법

규칙 1: 꼭 필요한 것만

  • 지출: 신용카드 앱이 자동 추적
  • 운동: 스마트워치가 자동 기록
  • 수면: 핸드폰이 알아서 측정

수동 입력 최소화.

규칙 2: 단순하게

복잡한 열 10개 → 날짜 + 했다/안했다

규칙 3: 분석보다 행동

차트 보는 시간 → 운동하는 시간

규칙 4: 완벽보다 대충

빈칸 있어도 OK.
데이터 불완전해도 OK.

현재 상태

남은 스프레드시트:

1. 지출 (자동화):
– 카드 앱에서 월말에 한 번 확인
– 수동 입력 없음

2. 프로젝트 관리:
– 진행 중인 것만
– 복잡한 분석 없음

나머지: 전부 삭제

데이터 입력 시간: 30분/일 → 5분/주

실제 행동 시간: 증가

비교

이전 (완벽한 스프레드시트):
– 일일 입력: 30분
– 시트 개수: 10개
– 데이터 완성도: 높음
– 실제 행동: 적음
– 스트레스: 높음

현재 (최소 기록):
– 일일 입력: 거의 없음
– 시트 개수: 2개
– 데이터 완성도: 낮음
– 실제 행동: 많음
– 스트레스: 없음

깨달은 것

1. 측정 ≠ 개선

데이터가 있다고 삶이 나아지지 않음.
행동해야 나아짐.

2. 자동화할 수 있으면 자동화

수동 입력은 비효율.

3. 불완전해도 됨

빈칸 있어도 삶은 돌아감.

4. 단순함의 가치

복잡한 분석보다 단순한 행동.

독서 노트 시스템 만들다가 책은 못 읽었던 경험도 같은 교훈을 줬다.

5. 목표와 수단의 구분

측정은 수단. 목표가 되면 안 됨.

결론: 측정보다 행동

스프레드시트의 역설:

문제:
– 모든 걸 추적하려 함
– 데이터 입력이 일이 됨
– 측정이 목표가 됨
– 행동할 시간 없음

해결:
– 꼭 필요한 것만
– 자동화 활용
– 단순하게
– 행동 우선

데이터를 완벽하게 기록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행동하는 게 100배 낫다.

가장 좋은 기록은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스프레드시트 채우지 말고, 그냥 하면 된다.


P.S. 이 글을 쓰는 동안 물을 3잔 마셨다. 기록 안 했다. 아무 문제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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