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일정 관리가 오히려 피곤했던 이유 – 캘린더 앱의 역설

모든 걸 일정에 넣으면 생산성이 올라갈까?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인생을 지배한다.”

어디선가 본 이 문구에 꽂혀서, 나는 Google Calendar로 모든 것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회의는 물론이고, “이메일 확인 30분”, “코드 리뷰 1시간”, 심지어 “점심 식사 45분”까지 일정에 넣었다.

타임 블로킹(Time Blocking)이라고 하던가. 모든 시간을 계획하면 낭비되는 시간이 없어지고, 하루가 더 생산적이 될 거라고 믿었다. 캘린더가 빈틈없이 채워질수록 뿌듯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캘린더를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졌다.

15분 단위로 쪼개진 하루

Google Calendar는 정말 강력한 도구다. 반복 일정, 알림 설정, 색상 코딩, 여러 캘린더 오버레이까지—모든 기능을 활용해서 완벽한 스케줄을 만들었다.

문제는 “완벽한 스케줄”이 전혀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9:00 – 9:30 이메일 체크
9:30 – 11:00 프로젝트 A 코딩
11:00 – 11:15 휴식
11:15 – 12:00 회의
12:00 – 12:45 점심
12:45 – 13:00 산책
13:00 – 15:00 문서 작성
15:00 – 15:30 커피 브레이크

이렇게 15분 단위로 쪼개진 하루를 보면서 깨달은 건, 실제 인생은 절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Todoist에서 완벽한 할 일 목록을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것처럼, 캘린더도 마찬가지였다.

“여백 없는 캘린더”의 압박감

더 큰 문제는 캘린더가 가득 차 있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의 일정을 확인하면, “오늘도 빡빡하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여백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긴급 미팅, 버그 수정, 갑작스러운 전화—모든 일정이 밀려버렸다. 그러면 저녁에 캘린더를 다시 정리해야 했고, 그게 또 스트레스였다.

Slack에서 즉각 응답 압박을 느꼈던 것처럼, 캘린더에서도 “일정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계획이 틀어지면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시간 관리를 못하나?” 하는 자책까지 생겼다.

일정 관리가 일정이 되어버린 순간

캘린더를 완벽하게 관리하려다 보니, 캘린더 관리 자체가 하나의 일이 되어버렸다.

  • 새 프로젝트가 생기면 관련 일정을 전부 추가
  • 주간 리뷰 시간에 다음 주 일정 세부 계획
  • 매일 저녁 다음 날 일정 재조정
  • 반복 일정 수정하고 색상 레이블 정리

하루에 30분 이상을 “캘린더 정리”에 쓰고 있었다. 노션에서 완벽한 시스템을 만드느라 실제 작업을 못했던 것과 똑같은 패턴이었다.

생산성 도구가 생산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캘린더 앱 5개를 전전한 이유

Google Calendar가 불편해지자,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Fantastical—자연어 입력이 편리하다
Notion Calendar—노션과 통합된다
Apple Calendar—디자인이 깔끔하다
Calendly—외부 미팅 예약이 쉽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앱을 쓰느냐”가 아니었다. Evernote에서 노트를 끊임없이 수집만 했던 것처럼, 캘린더 앱도 많아질수록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었다.

중요한 건 앱이 아니라 “얼마나 계획하고, 얼마나 여백을 남길 것인가”였다.

캘린더 정리보다 중요한 건 “하지 않을 일” 정하기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완벽한 일정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빡빡한 일정표는 오히려 스트레스만 만든다. 습관 트래커에서 하루 빠지면 모든 게 무너지는 완벽주의를 겪었던 것과 똑같았다.

지금은 캘린더에 정말 중요한 것만 넣는다:
– 고정된 회의와 약속
– 마감이 있는 작업(프로젝트, 리뷰 등)
– 그 외에는 “작업 시간” 블록으로만 표시

“이메일 확인 30분”, “휴식 15분” 같은 세세한 일정은 다 지웠다. 오히려 빈 시간이 많을수록 더 생산적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고, 중요한 일에 몰입할 여유가 생겼다.

결론: 일정은 가이드일 뿐, 절대 법칙이 아니다

캘린더는 도구다. 하루를 “통제”하는 도구가 아니라, “가이드”하는 도구여야 한다.

너무 빡빡한 일정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만들고, 유연성을 잃게 하고, 중요한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생산성의 핵심은 “얼마나 많이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다.

지금 내 캘린더는 예전보다 훨씬 비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더 많은 일을 해내고 있다.

결국 생산성 도구의 역설은 언제나 같다. 도구에 지배당하는 순간, 도구는 생산성을 높이는 게 아니라 방해한다. 노션도, Todoist도, Slack도, 그리고 캘린더도 마찬가지다.

자동화 레시피를 완벽하게 만들려다 4시간을 쓴 경험도 같았다. 계획과 설정에 시간을 쓰고 실행은 못 했다.

웹사이트 차단 앱으로 강제로 통제하려다 차단 설정만 조정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외부 도구는 내부 의지를 대체하지 못했다.

SMART 목표 15개를 완벽하게 세웠지만 달성은 0개였던 것도 같은 함정이었다. 완벽한 계획이 오히려 실행을 막았다.

가장 생산적인 캘린더는, 여백이 있는 캘린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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