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다 해줄 줄 알았다

“이제 AI한테 시키면 되겠네.”
ChatGPT가 나온 이후로 이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이메일 답장, 보고서 초안, 회의록 정리, 심지어 장보기 목록까지. 뭔가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자동으로 “AI한테 시키면 되지”가 먼저 떠올랐다.
유튜브에서 “ChatGPT로 업무 자동화하는 법”, “AI로 하루 3시간 절약하기” 같은 영상을 봤다. 생산성 유튜버들의 콘텐츠를 정주행했던 때가 떠올랐다. 프롬프트만 잘 짜면 비서가 생기는 것과 같다고 했다. 솔직히 흥분됐다. 드디어 나도 시간 부자가 되는 건가.
프롬프트 최적화에 빠지다

처음엔 간단했다. “이메일 답장 써줘”라고 하면 뭔가 나왔다. 문제는 그게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좀 더 친근하게”, “비즈니스 톤으로”, “상대방 이름 넣어서”, “마지막에 다음 미팅 제안도 넣어줘”…
프롬프트를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한 번에 원하는 결과가 안 나오니까 계속 다듬었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 프롬프트 수정하는 데 30분이 지났다. 직접 이메일 쓰면 5분이면 끝났을 일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 완벽한 프롬프트를 만들어두면 다음부터는 편하잖아.”
그렇게 ‘이메일용 프롬프트’, ‘보고서용 프롬프트’, ‘회의록용 프롬프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프롬프트를 정리할 노션 페이지까지 만들었다. 노션 템플릿을 만들다가 시간을 다 썼던 경험과 똑같은 패턴이었다. 프롬프트 관리가 새로운 일이 된 셈이다.
결과물 검토가 더 오래 걸렸다
AI가 만들어준 초안을 그냥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달랐다.
보고서 초안을 받으면 먼저 사실 확인을 해야 했다. AI가 그럴듯하게 지어낸 숫자나 정보가 종종 섞여 있었다. 한번은 존재하지도 않는 통계 자료를 인용해서 상사한테 지적받을 뻔했다.
회의록 정리를 시켰더니 핵심이 빠지고 엉뚱한 얘기가 길게 들어가 있었다. 결국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야 했다.
“확인하고 수정하는 시간”이 “직접 하는 시간”보다 길어지는 순간이 계속 생겼다. 그런데도 왠지 AI를 안 쓰면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미 구독료를 내고 있으니까. 생산성 도구에 200만원을 쓴 날들이 떠올랐다. 비슷한 심리였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몇 달 지나고 나서야 문제가 보였다.
AI에게 일을 시키려면 먼저 내가 뭘 원하는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 정작 그걸 정리하는 게 일의 절반이다. 프롬프트를 쓰기 위해 내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거기서 이미 일이 반쯤 끝나 있다. 자동화 워크플로우의 역설이 생각났다.
게다가 AI는 맥락을 모른다. 우리 팀이 어떤 분위기인지, 이 클라이언트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지난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매번 이런 배경 설명을 하다 보면 차라리 내가 쓰는 게 빠르다.
가장 큰 문제는 생각하는 과정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메일을 직접 쓸 때는 상대방 입장을 생각하게 된다. 보고서를 쓸 때는 내용을 한 번 더 정리하게 된다. AI에게 던져버리면 이런 과정이 생략된다. 메모만 하고 다시 안 봤던 경험과 마찬가지로, 생각 없이 결과물만 받으니 남는 게 없었다.
이제는 이렇게 쓴다
AI를 아예 안 쓰는 건 아니다. 다만 용도를 확실히 정했다.
AI를 쓰는 경우:
– 브레인스토밍이 필요할 때
– 내 글의 오탈자나 어색한 부분을 찾을 때
– 모르는 개념을 빠르게 이해하고 싶을 때
– 반복적인 형식의 문서를 만들 때
직접 하는 경우:
–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 창의적인 결과물이 필요한 작업
– 맥락이 많이 필요한 일
– 5분 안에 끝나는 일
특히 마지막이 중요하다. 5분 안에 끝나는 일에 AI를 쓰면, 프롬프트 쓰고 결과 확인하고 수정하는 데 오히려 시간이 더 든다. 마이크로 최적화의 함정과 같은 실수다.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AI 비서가 나를 생산적으로 만들어줄 거라는 기대는 환상이었다.
결국 일을 하는 건 나다. AI는 일부 과정을 도와줄 수 있지만, 생각하는 것까지 대신해주진 않는다. 오히려 AI에게 의존하려고 하면서 생각하는 습관이 사라질 뻔했다. 지식 관리 시스템의 역설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지금은 AI를 “만능 비서”가 아니라 “특정 상황에서 유용한 도구”로 본다. 드라이버가 모든 공구를 대체할 수 없듯이, AI도 마찬가지다.
“AI한테 시키면 되지”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제는 먼저 묻는다.
“이거 직접 하면 얼마나 걸려?”
의외로 대부분은 직접 하는 게 더 빠르다. AI 도구 10개를 써본 경험도 결국 같은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