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정보를 한곳에 모으면 나만의 지식 창고가 될 거야”

어느 날 유튜브 추천 영상이 떴다.
“세컨드 브레인 만들기 – Evernote로 모든 지식을 저장하라”
영상 속에서:
– 수천 개의 노트가 깔끔하게 정리됨
– 클릭 한 번에 원하는 정보를 찾아냄
– “내 두 번째 뇌”라는 표현
“이거다! 내가 읽고, 보고, 배운 모든 걸 저장하면 슈퍼맨이 되겠네!”
그날 바로 Evernote Premium을 결제했다.
모든 것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처음 2주는 열정적이었다.
저장한 것들:
– 📰 뉴스 기사 스크랩 (하루 10개)
– 📚 책에서 밑줄 친 문장들 (사진으로)
– 💡 유튜브 영상 요약 (수동으로 타이핑)
– 🔗 나중에 읽을 링크들 (200개 넘게)
– 📝 회의 메모, 아이디어 메모, 일기
– 🍳 레시피, 여행 계획, 쇼핑 리스트
“정보를 놓치지 않는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나중에 필요할 때 여기서 찾으면 되니까!”
2주 만에 노트 개수: 187개
완벽한 분류 시스템을 만들었다

노트가 많아지니 찾기 힘들어졌다.
“분류를 체계적으로 해야겠어!”
노트북 구조:
📁 업무
├─ 회의록
├─ 프로젝트
└─ 아이디어
📁 학습
├─ 독서노트
├─ 강의정리
└─ 개발
📁 라이프
├─ 건강
├─ 재테크
└─ 취미
📁 자료
├─ 나중에 읽기
├─ 레퍼런스
└─ 아카이브
태그 시스템:
중요 #긴급 #참고자료 #영감 #실행필요 #완료 #보류…
분류 체계를 만드는 데 3시간 걸렸다.
“이제 완벽해! 뭐든지 찾을 수 있어!”
노션에서 완벽한 템플릿을 만드는 데 몰두했던 때가 떠올랐다. 시스템 구축이 목적이 되었다.
저장은 했지만 다시 보지 않았다
3개월 후, 노트 개수를 세어봤다.
총 892개
“대단한데? 엄청난 지식 창고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저장만 했지, 다시 본 적이 없다.”
실험을 해봤다. 랜덤으로 노트 10개를 열어봤다.
- “효율적인 아침 루틴” – 2개월 전 저장, 기억 안 남
- “파이썬 리스트 컴프리헨션” – 3개월 전 저장, 이미 까먹음
- “나중에 읽을 기사” – 지금 읽어보니 관심 없음
- “좋은 회의 진행법” – 저장만 하고 실천 안 함
- …
저장 ≠ 학습이었다.
독서 앱에 책을 등록하는 것이 독서인 줄 알았던 착각과 똑같았다. 저장하는 행위 자체가 배운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검색해도 원하는 게 안 나왔다
어느 날, 급히 필요한 정보가 있었다.
“분명 Evernote에 저장해뒀는데…”
검색: “프로젝트 기획”
→ 결과: 47개
“너무 많아…”
검색: “프로젝트 기획 템플릿”
→ 결과: 12개
하나씩 열어봤다.
- 이건 아니고…
- 이것도 아니고…
- 아, 이것도 아니네…
10분 동안 찾다가 포기하고 구글 검색했다.
“Evernote에 저장하면 뭐하나. 어차피 못 찾는데.”
마인드맵을 47개나 만들었지만 정작 필요한 걸 못 찾았던 경험이 생각났다. 많이 저장할수록 찾기는 더 어려웠다.
저장하는 게 일이 되었다
하루 일과:
오전:
– 뉴스 기사 10개 스크랩 (20분)
– 어제 본 영상 요약 정리 (30분)
– 읽을 링크 저장 (10분)
오후:
– 회의 메모 정리 (15분)
– 책 내용 타이핑 (20분)
저장에 쓴 시간: 하루 1시간 30분
그런데 실제로 활용한 시간: 0분
“오늘도 10개 노트 추가했어!” 하면서 뿌듯해했지만, 실제로는:
– 저장한 기사: 안 읽음
– 정리한 영상: 다시 안 봄
– 회의 메모: 실행 안 함
저장 = 생산성이라는 착각
노트 정리가 끝나지 않았다
노트가 많아질수록 불안했다.
“이렇게 많으면 나중에 못 찾겠는데? 재정리해야겠다!”
재정리 작업:
– 중복 노트 삭제
– 태그 재분류
– 노트북 구조 개편
– 오래된 노트 아카이브
– 연결 노트 추가 (A 노트에서 B 노트로 링크)
2시간 걸려서 정리 완료.
하지만 다음 주에 보니 또 엉망이었다. 그리고 또 정리했다.
정리는 끝나지 않았고, 실제 활용은 시작도 안 했다.
Trello에서 보드 정리가 진짜 프로젝트보다 더 큰 일이 되었던 것과 같았다. 메모 관리 자체가 일이 되었다.
브라우저 탭을 매일 정리했지만 다시 쌓였던 것도 같은 패턴이었다. 정리는 반복되지만 활용은 없었다.
메모가 많다고 지식이 쌓이는 게 아니었다
가장 큰 착각:
“많이 저장하면 = 많이 아는 사람이 될 거야”
하지만 현실:
– 892개 노트 저장 → 기억하는 건 5개도 안 됨
– 200개 “나중에 읽기” → 실제로 읽은 건 3개
– 50개 “실행 필요” 태그 → 실행한 건 0개
저장 ≠ 지식
진짜 지식은:
– 저장이 아니라 반복에서 나오고
– 정리가 아니라 적용에서 나오고
– 노트 개수가 아니라 실제로 쓸 수 있는지로 판단된다
목표를 세우기만 하고 달성은 못 했던 함정과 똑같았다. 양이 질을 보장하지 않았다.
종이 메모장이 더 유용했다
우연히 책상 서랍에서 오래된 노트를 발견했다.
1년 전에 끄적인 메모들:
– 프로젝트 아이디어 3개
– 배운 것 한 줄 요약
– “다음 주에 꼭 할 것”
놀랍게도 이 노트가 Evernote 892개보다 유용했다.
왜?
– 양이 적어서: 한눈에 다 보임
– 핵심만 있어서: 중요한 것만 적었음
– 물리적이라서: 눈에 띄는 곳에 두면 자주 봄
Evernote에 저장한 정보는 앱 안에 갇혀서 다시 안 보게 된다.
하지만 종이는 눈앞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다시 보게 된다.
메모 앱을 지우고 나서
Evernote를 삭제했다.
“892개 노트가 사라지는데 괜찮아?” 친구가 물었다.
“사실 없어도 달라지는 게 없어.”
Before (Evernote 사용):
– 노트: 892개
– 저장 시간: 하루 1.5시간
– 다시 본 노트: 월 5개 미만
– 실제 활용: 거의 없음
– 스트레스: 높음 (정리 압박)
After (간단한 메모):
– 메모: 5-10개만 유지
– 기록 시간: 하루 10분
– 다시 보는 빈도: 매일
– 실제 활용: 높음
– 스트레스: 없음
시간 추적 그래프는 화려했지만 생산성은 없었던 경험이 겹쳤다. 메모 앱도 숫자의 환상을 만들었다.
집중 음악 플레이리스트 10개를 완벽하게 정리했지만 정작 집중은 못 했던 것도 같았다. 정리가 목적을 대체했다.
지금은 이렇게 한다
메모 앱 대신:
1. 종이 노트 (A5 하나)
– 정말 중요한 것만 적기
– 한 페이지에 한 주제
– 가득 차면 다시 읽고, 여전히 중요한 것만 새 노트에 옮기기
2. 텍스트 파일 하나
– inbox.txt: 빠른 메모
– 매주 금요일에 리뷰
– 중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 삭제
3. “나중에 읽기” 금지
– 지금 읽거나
– 아니면 저장 안 함
– “나중에”는 “절대”를 의미함
핵심: 저장보다 활용에 집중하는 것
배운 교훈: 저장은 학습이 아니다
메모 앱이 나쁜 건 아니다. 잘 쓰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나에게는 독이 되었다.
Evernote를 쓰면서:
– 저장이 학습인 것처럼 착각했고
– 정리가 생산성인 것처럼 느꼈고
– 양이 질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자동화 레시피를 만드는 데 시간을 쏟고 정작 절약된 시간은 없었던 경험도 비슷했다. 도구 설정이 진짜 일이 되어버렸다.
진짜 지식 관리는:
– 노트 개수가 아니라 몇 개를 실제로 쓰는지
– 완벽한 분류가 아니라 빠르게 찾을 수 있는지
– 모든 것을 저장하는 게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만 남기는 것
습관 체크박스를 열심히 채웠지만 진짜 습관은 생기지 않았던 것과 같은 함정이었다. 기록과 실행은 다르다.
당신에게 정말 메모 앱이 필요한가?
한 번 생각해보자.
- 저장한 노트를 다시 보는가?
- “나중에 읽기”를 실제로 읽는가?
- 노트 개수 vs 실제로 활용하는 개수?
- 검색보다 구글이 더 빠르지 않은가?
만약 메모 앱이 지식 착각을 만든다면, 버려도 괜찮다.
가장 좋은 지식 관리 시스템은:
– 노트 1000개가 아니라
– 기억하고 쓸 수 있는 핵심 10개
– 완벽한 태그 시스템이 아니라
– 눈에 띄는 곳에 있는 메모 3장
진짜 지식은 앱 안에 저장된 게 아니라, 당신의 머릿속과 행동에 남아있는 것이다.